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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야기

김형석교수 "백년을 살아 보니"

백년을 살아보니....

김형석 교수와의 대담 - 김 지수 기자

 
불멸이 아닌 영원을 추구하는 올드 보이 김형석.

 

그가 자연사 박물관 앞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자연사박물관은 말 그대로 자연사(自然史 natural history)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전시한 장소지만, 동시에 사막의 지평선처럼 자연사(自然死)라는 아득한 어휘도 떠오르게 했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노아의 대홍수 이후 인간이 무병장수하여 자연사(自然死)할 수 있는 연령은 120세 전후다. 그러나 단순히 오래 산다는 것이 무슨 복이랴. 돌처럼 생명 없이 매달린 채 억지로 24시간을 도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생명의 힘을 느끼며 사는 것은 모든 인간의 꿈이다.

 

그래서 백세 시대를 앞둔 우리는, 매일매일 조금씩 죽어가는 노인이 아닌, 위엄 있게 삶을 증거 하는 노인을 만나고 싶다.

 

그는 단정한 푸른 셔츠에 깨끗한 흰 모자와 점퍼를 입고 있었다. 키는 작았으나 앉은 자세도 선 자세도 소나무처럼 꼿꼿했다. 보청기, 보철 틀니, 지팡이 등 허물어지는 육체를 상징하는 어떤 보조물도 없었다. 46년을 쓴 나의 육체보다 97년을 쓴 그의 육체가 오히려 더 자연스럽고 어긋남이 없어보였다.

 

한 세기를 살아 온 한국 철학의 큰 산맥 김형석 연세대학교 철학과 명예 교수. 97세의 ‘현역’ 철학자는 매일이 바쁘다고 했다. 집안 책상 위엔 매일 매일 칸을 메워야 할 원고지가 기다리고, 일주일 단위로 강연 요청도 쇄도한다고.

 

최근에 다시 펴낸 에세이 ‘나는 아직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 ‘예수' ‘어떻게 믿을 것인가' 등의 판매 추이도 좋지만, 노년을 앞둔 사람들을 위한 100세 인생 가이드 ‘백세를 살아보니'는 발간 2주 만에 1만5천부가 팔렸다. 통계를 살펴보면 20대 독자도 50대 독자도 고루 백세 현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다.

 

▲ 노년을 준비하는 50대를 위해서 쓴

자상한 인생 가이드 ‘백년을 살아보니'. 재혼에 대한 문제, 재산 증여에 대한 문제, 무엇을 먹고 어떻게 운동할 것인가에 대한 인생 선배의 경험담이 생생하다. “‘백세를 살아보니'는 8개월 동안 손으로 매일매일 썼어요. 어젯밤에 독자 입장에서 다시 읽어보았더니, 글을 쓴 작가가 정이 많고 마음이 젊은 사람처럼 느껴지더군요(웃음).

 

다들 재미있다고 이 다음엔 무슨 얘기가 또 나올까 벌써 궁금하다고 해요."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윤동주 시인과 함께 공부했던 이 어른은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부드러움과 위엄이 내비치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마주 앉아 ‘사랑'이니 ‘고독' 이니 ‘윤동주'나 ‘김수환'같은 언어를 흘려보낼 땐, 노인의 단정한 가슴팍 위로 늦여름 바람이 부드럽게 공기의 파동을 일으켰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맞습니까?

 

“60은 돼야 성숙하고 창의적인 생각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60에 어떻게 살까'는 40대에 정해야 해요. 지금은 다 떠났지만 내 동년배인 안병욱 교수, 김태길 교수, 김수환 추기경도 60~75세까지 가장 창의적이고 찬란한 시기를 보냈어요. 좋은 책은 모두 그 시기에 썼지요. 75세가 되면 그 절정의 상태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에요. 잘 하면 85세까지 유지가 되고 그 다음엔 육체적인 쇠락으로 내려와야지요.”

 

-선생의 경우 60부터 시작된 절정이 30년 넘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97세까지 오리라 예상했습니까?

 

“90까지는 예상을 했지만, 더 연장되고 있어요. 나이 드니 김태길 교수는 이야기의 맥을 놓치고, 안병욱 교수는 귀가 나빠지더군요. 내가 겪어보니, 눈 귀 중에 선택하라면 듣는 걸 택하겠어요. 앞을 못 봐도 철학자 시인이 되지만, 듣지 못하는 사람 중에 사상가가 나온 적이 없지요. 다행히 나는 지금도 보청기를 안 써요.”

 

▲ 불멸이 아닌 영원을 추구하는 올드 보이 김형석

 

1920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난 김형석 교수는 일본 상지대(上智大) 철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철학과에서 30여 년을 가르쳤다. 서울대 김태길 교수, 숭실대 안병욱 교수와 함께 대한민국 철학 1세대로 지성사를 이끌었다. 논리로 파고드는 철학자였지만 동시에 피천득을 잇는 서정적인 수필가이기도 했다.

 

60세에 뇌출혈로 쓰러져 눈만 깜빡이며 자리에 누운 부인을, 23년 동안 차에 태워 돌아다니며 세상을 보여주고 맛난 음식을 입에 넣어주었다. 상처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는 부인의 손때가 묻은 낡은 집에서 홀로 지낸다.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고독이지요. 90이 넘으면 친구가 사라집니다. 아내도 가버리지요. 세상이 텅 빈 것 같아요. 어머니와 아내가 살아있을 때 각각 이쪽 방 저 쪽방에 몸져 각각 누워있었는데, 어머니가 눈을 감기 전에 그러시더군요. “나도 가고 네 처도 가면 집이 텅 빌텐데 네가 빈 집에서 어찌할꼬?” 은근히 재혼을 권유하셨던 것인데, 그때는 몰랐어요. 젊을 적에 집은 어머니고, 나이 들어 집은 아내인데, 다 떠나고 나니, LA에 딸 집에 있다 서울행 비행기를 타도 “서둘러 가면 뭐하누?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저는 고독을 이기기 위해 80이 넘은 제자들과 만납니다(웃음). 함께 ‘인천상륙작전' 영화도 보고 식사도 하지요. 고마운 건 교육자는 원래 씨를 뿌리고 그 덕은 사회가 보는 것인데, 오래 살다 보니, 그 열매 맺은 것을 제가 보고 누린다는 거지요.”

 

현재의 삶에 만족하십니까?

 

“조금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재혼을 했을텐데…(웃음) 최선을 다하고 있고,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으니 만족하지요. 만족의 원동력은 일이예요. 잠자는 것 먹는 것 빼고는 일에만 집중해요. 다음 주에도 열흘 동안 내리 강의가 잡혀 있어요.”

 

97세에도 쉬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 나이쯤 되다 보면 가정이나 사회에서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해요. 하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하나는 사소한 것이라 해도 존경받을 만한 점이 있어야 해요.

 

나는 아들 딸 손주들과 식당에 들어갔다 나올 때 꼭 “우리 때문에 늦게 퇴근해서 미안하다. 좋은 음식 대접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합니다. 버스나 택시를 타고 내릴 때는 “수고하십니다, 감사했습니다"라고 하지요. 가끔 팁도 드려요. 그런 행동은 손주들에게 좋은 본이 되고, 수고로운 일을 하는 분들에겐 직업의 의미를 찾아주게 돼요.

 

청년 시절 저도 식당 웨이터나 가벼운 노동을 해보았는데, 그때 내 인격과 직업을 소중히 대해주는 사람 덕에 자존감을 잃지 않았습니다. 옷 한 벌 입는 것도 그래요. 아내가 20년 넘게 병중에 있다보니, 매무새가 추레해질 수 있어요. 언젠가 한 후배 교수가 옷차림을 지적해줘서, 그 뒤로는 더 깨끗하게 챙겨입으려고 해요. 그래야 사회가 더 아름다워지지요.”

 

-따님에게 이런 말씀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인내 하나 배우러 오는 것 같다.”
어떤 뜻입니까?

“수많은 역경을 거치면서 여섯 아이들을 키워냈는데, 그동안 불만을 터뜨리거나 화를 내지 않았어요. 어떤 상황이든 자제하는 마음을 유지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다들 어떻게 여섯이나 키워냈나 신기해하지만, 나무가 아니라 숲으로 자라니 좋은 점이 많았지요. 강아지 6마리를 키워도 방향만 잘 졍해주면 저희들끼리 알아서 가는 것과 같은 이치예요(웃음). 욕심내지 않고 착하고 아름답게 사는 모습을, 아내가 잘 보여줬어요. 아내는 유능하진 않지만, 감정이 아름다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많이 안겨줬어요.”

 

노년의 사랑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젊어서는 연정이고 애들 키우면서는 애정이고 75~80쯤 되면 인간애로 변해요. 모든 여성을 대할 때 자연스럽고 부담이 없지요. 20년 아내를 간병했더니, 주변 남자들이 “김 선생때문에 우리가 부담느껴요"그래요. 그러면 직면해보세요(웃음). 23년이 4~5년처럼 후딱 갑니다. 늙어서 인간애로 가지 못하면, 파고다 공원의 노인들처럼 ‘노욕'에 괴로울 뿐이지요.”

 

▲ 그는 청년 시절, 고향 근처를 찾아온 북한의 김일성과도 만나 반나절 가량 대화를 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공산 치하를 피해 맨 몸으로 월남한 후 질곡의 현대사를 겪었다./사진=이태경 기자-일제시대부터 6.25 전쟁과 민주화 시기, 글로벌 경제 위기까지 온 몸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겪으셨는데, 소년기와 청년기에 특별히 더 기억나는 일이 있으신가요?

 

“오늘도 원고 한 편을 끝냈는데, 신사참배에 관한 글이예요.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다녔는데, 그때 윤동주 시인과 함께 학교를 다녔어요. 윤동주 시인은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만주 용정으로 떠났어요. 당시에 교장 선생님이 교회 장로셨는데, 학교를 폐교할 수 없어서 아이들을 이끌고 가장 먼저 참배를 했어요. 그분이 돌아서면서 흘리던 눈물을 잊을 수가 없어요. “아! 우리를 위해서 이 분이 십자가를 지시는구나" 덩달아 눈물이 났지요.”

 

가장 큰 스승으로 누구를 꼽으십니까?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인촌 김성수 선생이십니다. 도산 선생은 감옥에 계시다 돌아가시기 한 해 전에 가석방이 되셔서 고향으로 오셨어요. 내가 살던 옆동네였지요. 덕분에 도산 선생의 마지막 연설을 들었어요. 열 여덟 살 때였는데, 오로지 나라 걱정밖에는 없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27살엔 중앙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인촌 김성수 선생에게 많이 배웠어요.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라. 동료 비방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지 말아라. 편가르는 사람을 믿지 말라"던 말씀이 그 뒤로 구체적인 인생 지침이 됐지요.”

 

30년 간 일주일에 3번 수영하고, 정초엔 송추의 북한 음식점에 가서 고향을 생각하며 평양 냉면을 드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밖에 고집처럼 지키는 습관이 있습니까?

 

“신앙이라는 습관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가정 환경으로 일찍 기독교도가 되었어요. 철학을 공부하러 일본 유학을 떠났는데, 그때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일본 시모노새키에 내렸어요. 그때 망망한 바다 뱃길을 지나면서 이쪽에서 저쪽까지 파도가 쳐도 내가 빠지지 않도록 밧줄같은 게 달려 있다고 느꼈어요. 그게 바로 신앙이었죠.”

 

-철학자이시면서 진보적인 신앙인입니다. 어려서부터 평양의 교회에서 자랐지만, 철학을 공부하고 나니 신학으로 건너갈 수 없었다,고 했지요. 프로이드 얘기를 하면서, 우리나라 목사들이 성경은 알지만 인간은 모른다,는 취지의 말씀도 인상적이었어요. 그렇다면 인간을 아는 것이 철학입니까?

 

“철학은 인간에 대해 알려주지만, 인간이 처한 문제는 해결을 못해줍니다. 그러면 종교가 해결을 해주느냐? 아닙니다. 나는 그 답을 예수에게서 찾았어요.

 

안병욱 선생과 내가 경험을 통해 내린 결론은 인격의 핵심은 성실이라는 겁니다. 성실하게 살면서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은 공자에요. 공자는 성실한 윤리학자였어요. 하지만 공자는 영원성, 내세의 문제, 인생의 참다운 자유와 행복에 대한 문제 해결은 못내렸어요. 그것은 종교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신앙을 가지려면 성실성에 경건성이 더해져야 합니다.

 

성실한 사람은 악마가 건드리지 못합니다. 유혹을 받는 것은 성실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경건이란 무엇이냐? 호수가 잔잔해야 달그림자와 별그림자를 볼 수 있어요. 그 잔잔함이 바로 경건이지요. 철학자 가운데 가장 성실한 사람은 칸트였어요. 칸트는 신을 받아들이진 못했지만, 신이 있는 사회를 희망했습니다.

 

내 친구 김태길 선생은 말 년에 딸을 슬프게 잃었어요. 그런데 철학자이자 윤리학자인 그 분의 슬픔을 철학과 윤리가 해결을 못해줍니다. 그 분도 결국 신앙으로 돌아왔지요. 그때 그는 성실이 아닌 경건을 받아들인 겁니다. 더 높고 영원한 것을 말이지요.”

 

▲ 예수의 행적에 대한 치열한 탐구로 고전이 된 김형석의 명저 ‘예수'.

 

-철학과 신앙의 경계는 성실과 경건의 경계입니까?


“같은 듯 다른 그 경계선에 있지요. 내가 ‘운명도 허무도 아니라니'라는 책에도 썼듯이 철학자는 결국엔 두 부류예요. 운명론자 아니면 허무주의자입니다. 니체는 운명론자였어요. 태양이 서산에 지는 것처럼 운명에 맡기라는 거지요. 나는 운명도 허무도 아닌 섭리를 받아 들였어요. 섭리란 내가 모르는 제 3자가 나를 이끄는 것을 느끼는 겁니다.”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종교가 비합리적이고 지적으로 부정직하며 나약한 선택이라는 추론이지요.

 

“서울대학교 박종홍 교수는 대한민국 1세대 철학자로 여전히 가장 존경받는 지성인입니다. 그분은 지성 誠, 이룰 成, 거룩할 聖의 3단계를 이야기하며, 이 길이 철학에서 종교에 이르는 길이라고 했지요. 내가 살아온 나날을 훑어봐도 내 선택이 아니라 섭리가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철학자가 도달한 신앙은 목사나 신부들의 신앙과는 다릅니다. 몇 십년을 학문적으로 두드린 후에 내린 결론이지요(웃음).”

 

괴테는 어떻습니까?

 

괴테는 인류 역사상 가장 똑똑한 사람입니다. 역사적인 인물의 아이큐를 추정한 콕스 아이큐 지수(Cox IQ)에 의거해서 아인슈타인을 훨씬 앞질렀지요. 그는 회의주의자였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요. 철학자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 2위는 존 스튜어트 밀, 3위는 라이프니츠, 4위는 파스칼이었어요.”

 

지혜의 상징인 솔로몬은 어떻습니까?

“솔로몬은 유신론적인 허무주의자였습니다.
솔로몬과 괴테는 많은 면에서 서로 통하고 있어요.”

 

중요한 차이는 무엇인가요?

 

“신앙을 가진 사람은 겸손하고, 겸손한 사람이 경건해질 때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입니다. 동국대학교 교수였던 불교학자 이기영 박사는 천주교도였다가 불교신자가 됐어요. 이유를 물었더니, “석가의 마음이 예수보다 넓더라"고 하더군요(웃음). 예수는 헤롯 왕을 일컬어 여우같은 놈이라고 욕도 했다면서요.

 

석가와 예수의 차이는 한 가지예요. 석가는 현실 세계의 정치, 경제, 질병, 가난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 깊이 공감하거나 동참하지 않았어요. 예수는 로마시대에 살면서 버림받은 사람에게 들어가 정의와 사랑을 함께 실천했지요. 석가는 사랑만 있었지 정의는 없었어요. 예수는 우리를 사랑했기에 십자가를 질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진정한 크리스찬은 사회를 떠날 수가 없어요.”

 

슬플 때는 언제인가요?

 

“수다 떠는 남자는 슬프지 않아요(웃음). 다만 괴로울 때가 있어요. 사람들이 나라를 민족을, 더 깊이 사랑하지 못할 때 답답해요. 나는 지금도 대전 현충원이나 광주 망월동에 가보곤 해요.”

 

아내로 인해 눈물을 흘리진 않았습니까?

 

“내 아내가 뇌출혈로 쓰러져 누운 지 2년 쯤 됐을 때였어요. 강의 끝나고 창밖을 보는데 왠지 모르게 슬퍼져서 눈물이 났어요. 23년 동안 그때 한번 울었어요.”

 

▲ 기독교 환경에서 자랐지만, 교회가 아닌 예수를 따른다고 말하는 김형석

 

연세대학교 백낙준 총장이 “김형석 교수는 대한민국에서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철학 강의 잘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분이다”라고 했지만, 기실 대중들에겐 정서가 풍부한 수필가, 종교 사상가로 더 많이 사랑받았습니다. 정체성에서 혼돈은 없으셨나요?

 

“하나로 규정할 수가 없었어요. 철학 교수도 아니고, 수필가도 아니고, 종교인도 아닌, 그냥 나답게 살았던 거죠. 철학자로서는 칸트에서 헤겔, 키에르케고르까지 독일 관념론을 연구했어요. 논리적인 이론 철학과 윤리적인 실천 철학을 정리해서 65세 정년 퇴직한 이후에는 6~7년 동안 ‘윤리학' ‘역사 철학' 등 철학책을 많이 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내 책 중에서 ‘예수'같은 종교서적이나 ‘고독이라는 병' ‘영원과 사랑의 대화' 등 수필을 좋아하더군요. 피천득 선생 이후 수필 문학의 맥을 이끌어왔다고 하면서요(웃음). 나도 철학을 연구했지만, 정작 내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준건 도스트에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었답니다.”

 

1970년대에 쓰신 ‘고독이라는 병’

‘영원과 사랑의 대화’ 등의 에세이는 한 해 60만 부가 넘게 팔리며 출판계 기록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잘 쓰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십니까?

 

“매일 밤 기나긴 일기를 써요. 문장이 잘 연결되게 하기 위해서요. 재작년, 작년의 일기장을 꺼내 2년간 무슨 일이 있었나 읽어보고, 그 시간을 연결 지어서 오늘의 일기를 쓰는 식이예요. 문장력이 약해지면 안되니까 계속 훈련을 해요.

 

그런데 재작년 오늘의 일기를 읽어보니, 함께 살았던 가정부가 “선생님, 자식들이 안 좋아할 지 모르지만, 지금이라도 재혼을 하세요.” 그랬더군요. 70 넘은 할머니가 7~8년 간 나를 관찰하면서 그렇게 인간적인 조언을 해준 거예요(웃음).”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누구도 모릅니다. 천국은 중요하지 않아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아름답게 남길 수 있느냐까지만 우리 문제입니다. 나머지는 종교인들의 문제지요. 내가 다니는 감리 교회의 조창환 목사가 미국에 있다가 한국에 와서 목사 시험 볼 때 떨어질 뻔 했다고 해요. 교리 시험에서 “천당과 지옥을 믿느냐?”는 문제가 있었는 데 “성격과 형태는 모르지만 천국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지옥은 만들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가 떨어졌대요. 나중에야 조 목사의 겸손함을 보고 다시 붙여줬다고 하더군요.

 

천국, 지옥, 연옥은 쉽게 얘기할 수 없어요. 지나치게 거론하는 것이 비종교적이지요. 다만 우리 사회는 모든 종교가 너무 샤머니즘적인 기복 신앙이라는 데 있어요. 기독교가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아요. 가령 목사가 고통받는 교인을 위로할 때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단정하는 건 기독교가 아니예요. 그게 팔자소관이나 운명론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건 섭리가 아니지요.

 

복받기 위해 종교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 자기 그릇만큼의 신앙을 가질 뿐이지요. 내 아내가 살았을 때, 딸들은 “엄마는 졸기만 하면서 왜 교회를 가?”하고 물었어요. 아내는 “난 설교 시간에 졸아도 사랑하는 건 남을 위해주는 거라는 건 알아!"라고 답했어요. 현답이지요.”

 

기독교에서는 장수를 큰 복으로 여깁니다. 실제로 장수하니 행복하신가요?

 

“나이 드는 건 경계선을 넘어가는 일이예요. 내가 지금도 강의를 하니, 80이 넘은 제자들이 다시 들으러와요. 처음엔 97세 노인이 어떻게 하나, 구경하는 셈 치고 왔다가 학교에서 배울 때 보다 더 새롭다고 해요. 그러면서 “선생님 120살 까지 사실 거예요.” 합니다. 그럼 “내가 지금 얼마나 힘들게 사는 데 20년이나 이 고생을 더 하라고?” 그래요. 남들은 모르죠. 내가 지팡이 없이 걷기 위해, 이 나이에 강의 준비하기 위해 매일매일 얼마나 노력하는지요.

 

높은 산을 넘으니, 내가 산 넘는 게 쉬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고통은 아니지만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지요. 아들 딸도 그 외로움을 몰라요. 오로지 곁에서 오래 살던 가정부만 알지요(웃음).”

 

꿈이 있으십니까?

 

“꿈은 미래지요. 내 안에는 미래보다 현재만 가득합니다.”

-선생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인간의 본질은 노력하는 존재가 아닌가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핵심은 희망이 있고 창조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97세 현자의 목울대에서 나오는 어휘는 논리와 운율의 짝을 찾아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 갔다. 달고 시원한 지혜는 먼 곳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나 모래 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처럼 들렸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희망과 창조'를 전하는 노인 앞에 섰자니,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젊어졌는데, 나는 어쩌자고 두 손 놓고 늙기로했던가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김형석 교수가 모자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연사박물관 쪽으로 난 집을 향해 걸어갔다. 지는 해가 그의 등 뒤로 긴 그림자를 만들어 내자, 문득 사막을 걸어가던 ‘어린 왕자’의 마지막 장이 떠올랐다. ‘삶은 상당히 거칠다. 그러니 삶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지.’ 노교수의 등은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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